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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변연하①] 농구와의 우연한 만남 “연하야 선생님이 부르셔”

기사승인 2016.04.23  04: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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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하(동주여상)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6년 7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51회 전국남녀종별선수권대회 은광여고전에서 슛을 던지고 있다. (C)스포츠타임스DB

[스포츠타임스=홍성욱 기자] ‘여자농구’ 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변연하다. 속이 뻥 뚫리는 3점슛에 수비수를 달고 뛰는 현란한 돌파, 거기에 송곳처럼 찔러주는 패스까지 그야말로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그런 변연하가 2016년 4월 21일 은퇴를 선언하며 정든 코트와 작별을 고했다. 이제 더 이상 팬들은 선수 변연하를 만날 수 없다. 그가 달았던 등번호 10번은 마지막 소속팀 KB스타즈의 영구결번으로 남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 농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유니폼을 벗는 변연하의 농구인생 1막을 스포츠타임스가 정리했다. <편집자 주>

▲ 키 큰 소녀, 농구와 만나다

“연하야 선생님이 부르셔.”

부산 우암초등학교 4학년이던 변연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교무실로 달려갔더니 담임 선생님은 변연하의 손을 잡고 교감선생님 앞으로 향했다.

뿔테 안경을 쓴 교감 선생님은 “니 농구할 생각 있니?”라고 물으셨다.

갑작스런 질문이 나온 건 일주일 전 운동회 때문이었다. 해운대 초등학교를 지도하고 있던 강을동 옹(당시 73세)이 손자 운동회 구경길에서 키 큰 소녀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변연하는 160센티로 반에서 키가 제일 컸다. 당연히 농구인의 레이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당장 시작은 못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해운대까지 통학하는 것도 반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두 달이 지나 여름방학이 되자 변연하는 버스에 올랐다. 방학 기간 중에만 농구단 훈련에 참가하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농구를 잘 몰랐지만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냥 공놀이였죠.”

방학이 끝날 즈음 변연하는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저 농구할래요.”

그 때는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변연하는 해운대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농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 친구 김분좌를 농구계로 이끌다

혼자 통학하던 변연하는 쓸쓸했다. 길도 막히고 때론 힘도 들었다. 무엇보다 말동무가 필요했다. '키 큰 친구 누구 없을까?'라는 생각을 반복하다 2학년 때 같은 반이던 김분좌를 떠올렸다. 

“분좌를 찾아갔어요. 만나자마자 함께 농구하자고 했죠. 안한다고 하기에 버스 차비랑 간식을 책임진다고 끝까지 꼬셨어요.”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던 변연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보였다.

얼마 후 김분좌와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통학친구가 됐고, 농구부에서 늘 함께 지냈다. 변연하와 김분좌는 해운대초등학교와 동주여중·고까지 9년 동안 동고동락했다. 고3이던 1998년에는 함께 청소년대표로 뽑혔다. 중국에 가서 국제경기도 하고, 함께 만리장성 관광까지 했다.

1999년 실업농구 삼성생명(변연하)과 국민은행(김분좌)으로 갈라져 처음으로 색깔이 다른 유니폼을 입고 적으로 만났고, 이듬해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졌지만 두 사람은 추억을 쌓으며 우정을 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때 버스를 타고 대연동에서 해운대까지 다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이제 시간 여유도 생겼으니 분좌랑 밥도 먹고 옛날 얘기도 나눠야죠.”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한 인연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특히 변연하는 그 때 잡은 농구공을 무려 26년 동안 놓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사반세기는 인생의 황금기였다.

▲ 고1 때 실업팀에 스카우트된 ‘될성부른 떡잎’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변연하는 172센티까지 자랐다. 포지션은 당연히 센터. 동주여중에서도 변연하의 위치는 골밑이었다.

1학년 때부터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변연하는 중학농구를 접하면서 진짜 선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인사이드에서도 다부지게 버텼고, 농구 기량도 부쩍 늘었다. 당시 허만덕 감독은 지금도 동주여중을 이끌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동안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변연하 개인적으론 스카우트 들의 눈에 든 중요한 선수였지만 팀이 전국 무대에서 특별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기에 유망주일 뿐이었다.

3년이 흘러 동주여상(지금의 동주여고)에 입학하면서 변연하의 농구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여성 지도자인 차명신 코치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변연하를 센터에서 가드로 돌린다. 성인 무대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큰 변화를 겪은 변연하는 훈련을 통해 고비를 이겨냈다.

그는 “농구를 시작하고 처음 외곽으로 나왔어요. 3점슛이 안되니 죽겠더라고요. 그 때 만큼 노력했던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새벽 1시 전에 체육관에서 나온 기억은 없고요. 2시 넘어서까지 슛을 던진 날이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피나는 노력이 새로운 변연하를 만든 것이다. WKBL리그 역대 최다인 3점슛 1,014개를 쏘아올린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된 것. 변연하의 슛폼은 고등학교 때 그대로다.

1996년 고등학교로 올라와 첫 대회가 열렸다. 변연하는 긴장된 마음으로 서울행 원정 명단을 기다렸다. 가드로 변신한 뒤 첫 대회이기도 했다. 당시 여고 농구부는 학교마다 20명 전후의 선수를 보유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대부대였다. 따라서 1학년은 상당히 잘하는 선수가 아니고선 서울 원정길에 동행할 수 없었다.

변연하는 서울 전국종별선수권대회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고 전국무대에 가드로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더 놀라운 건 대회를 마치고 삼성생명 관계자가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사실. 일사천리로 계약까지 마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취업 관문을 뚫어낸 변연하였다. 

“계약을 하고나니 마음이 편했어요. 그 때는 실업농구였고,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 시절이었지요. 그래서 이후에 더 마음 편하게 농구를 했던 것 같습니다.”

변연하의 학창시절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홍성욱 기자 mark@thesportstimes.co.kr

<저작권자 © 스포츠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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