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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변연하②] 새벽마다 던진 슛, 개인훈련으로 만들어진 ‘농구 여왕’

기사승인 2016.05.07  05: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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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 시절의 변연하. (C)WKBL

[스포츠타임스=홍성욱 기자] ‘여자농구’ 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변연하다. 속이 뻥 뚫리는 3점슛에 수비수를 달고 뛰는 현란한 돌파, 거기에 송곳처럼 찔러주는 패스까지 그야말로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그런 변연하가 2016년 4월 21일 은퇴를 선언하며 정든 코트와 작별을 고했다. 이제 더 이상 팬들은 선수 변연하를 만날 수 없다. 그가 달았던 등번호 10번은 마지막 소속팀 KB스타즈의 영구결번으로 남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 농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유니폼을 벗는 변연하의 농구인생 1막을 스포츠타임스가 정리했다. <편집자 주>

▲ 우승기억밖에 없는 고3 시절

동주여상 1학년 때 삼성생명과 계약을 마친 변연하는 이후 마음 편히 농구에 매진했다. 가드 포지션도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졌고, 외곽슛도 정확해졌다. 자신감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상황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1998년에는 전국체전을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특히 대통령기 우승으로 중국에 건너가 한·중·일 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고3 때를 생각하면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전국체전을 빼곤 대회만 나가면 우승이었죠. 체전은 지역 예선이 중요했는데 정말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본 친구들과 지겹도록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삼천포에는 진신혜(은퇴/전 KEB하나)랑 김향미(은퇴/전 우리은행)가 있었고, 마산에는 신정자(은퇴/전 신한은행)와 임영희(우리은행)가 있었어요”라며 변연하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이제 모두 정든 코트를 떠나거나 이미 떠났고, 임영희 혼자만 현역으로 남게 됐다.

밥 먹듯 우승한 기억을 뒤로 한 채 변연하는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삼성생명 선수단에 합류했다.

▲ 성인농구 무대의 높은 벽

낯선 땅 서울에서 하늘같은 언니들을 만난 변연하는 충격에 빠졌다. 고등학교 농구와는 천지차이였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최대 2년 터울이었던 고등학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학생 농구와 성인 농구 사이의 잘 보이지 않던 벽을 확실하게 느낀 것. 10년 선배의 농구까지 한 팀에서 보면서 며칠 동안 긴장을 풀지 못했던 변연하는 멍해졌다.

“사실 고등학교 때 농구 좀 한다고 생각하고 삼성생명에 왔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언니들이 그냥 잘하는 게 아니고 너무너무너무 잘하는 거예요. 제겐 엄청난 충격이었죠. 실업농구를 TV로 보면서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와보니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거예요. 그 때 충격이 컸어요.”

또 한 가지 변연하는 기에서도 눌렸다.

“그 때는 지금과 너무도 달랐어요. 여자 선수끼리 숙소 생활을 하다 보니 생활적인 면에서 먼저 기를 죽여 놓고 시작했죠. 정말 언니들이 별걸 다 시켰어요. 언니들 빨래는 기본이었고, 새벽마다 대청소를 하는 거예요. 처음엔 내가 지금 서울에 농구를 하러 온 건지, 아님 청소를 하러 온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랬다. 변연하는 허드렛일을 마치고서야 겨우 농구공을 만질 수 있었다. 지금 현실과는 너무도 달랐다.

“올해 초 은퇴 직전까지 저는 제 짐을 다 들고 다녔어요. 가끔 무거운 걸 들고 나닐 때 빈손인 후배들이 그냥 지나가면 정말 옛날 생각이 나요. 저는 본전 못 찾은 거죠”라며 변연하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 새벽 청소 대신 새벽 슈팅을 던진 변연하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 새벽을 시작했던 변연하는 매일 빗자루를 들 때마다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저와의 약속을 매일 했죠. ‘후배가 들어오면 새벽 시간에 꼭 운동을 할거야’라고요. 수없이 반복했던 약속이면서 다짐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자정 너머 새벽 2시까지 슛을 던졌던 변연하는 후배들이 들어와 청소를 면하게 되면서 이번에는 달콤한 새벽잠 대신 개인훈련을 하기로 작정했다.

서울 서초동 숙소에서 걸어 나가면 바로 체육관이라 환경은 좋았다. 새벽마다 불을 켜고 슛을 던지며 하루를 시작한 것은 오늘의 변연하를 만든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당시 저는 잘하고 있는데 언니들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가 절대로 아니었어요. 실력이 부족했죠. 저도 느꼈어요. 더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변연하는 이렇듯 노력형 선수다. 정신력과 더불어 실천의지 또한 강했다. 초등학교 때 키가 컸다는 점을 빼면 그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선수다. 특히 팀 훈련이 아닌 개인훈련으로 자신을 성장시킨 대표적인 케이스다.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그 때는 멤버가 워낙 좋으니 나가면 이겼어요. 팀 훈련이 많지도 않았죠. 시간을 내서 개인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연하의 말이다. 그의 욕심은 결국 그를 체육관으로 내보냈다.

▲ 변연하를 키운 서동철 코치와의 일대일 승부

변연하가 처음 성인농구에 뛰어들었을 때 삼성생명은 정태균 감독과 서동철 코치 체제였다. 특히 선수에서 코치로 변신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서동철 코치는 선수들과 일대일을 하며 다가갔다. 개인훈련이 많았던 변연하는 가장 많이 상대한 케이스.

새벽 훈련을 혼자 소화했던 변연하는 오전과 오후 훈련을 30분 앞두고 미리 나와 서 코치와 일대일 훈련을 했다. 이는 공격 기술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변연하는 “그 때 서 코치님이 은퇴 직후라 거의 선수 몸이셨어요. 당시 CD 한 장이 1만 천원이었는데 이기면 좋아하는 가수 CD를 사주기로 내기를 했죠. 제가 반쯤 이긴 걸로 기억해요”라며 회상했다.

훗날 KB스타즈에서 감독과 선수로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 얘기부터 나눴다는 두 사람의 기억은 똑 같았지만 단 한 가지가 달랐다.

서동철 감독은 “진 기억이 없다. 어쩌다 설렁설렁 할 때 한 두 번 진 것 말고는 기억이 없다”며 웃음을 보였다.

변연하는 “그 때 정말 많이 늘었어요. 땀에 젖어 훈련을 시작하려고 할 때쯤 언니들이 나와 신발끈을 묶으며 심판도 봐주고, 제 편도 들어줬지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변연하는 이렇게 성인무대에 적응하며 실력이 쑥쑥 늘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

홍성욱 기자 mark@thesports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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